9-천불동계곡 단풍
천불동계곡 단풍
설악산의 천불동계곡은 비선대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약 7km 정도의 계곡을 말한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비선대에서 대략 3.5km에 있는 양폭대피소까지 오르며 문주담, 이호담, 귀면암, 오련폭포, 양폭포, 천당폭포의 절경을 만끽한다. 장군봉, 형제봉, 선녀봉(적벽)이 올려다보이는 천혜의 비경 비선대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로, 어린이와 노약자들도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다. 가을 단풍철이면 어김없이 밀려드는 등산객들과 타고 온 차들로 몸살을 앓는 설악산이다 보니 위용을 자랑하는 바위, 진한 옥색의 맑은 물과 어우러지는 단풍 사진을 찍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떠오르는 햇빛에 비치는 단풍을 찍기 위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도착했지만 벌써 몰려든 차들로 인해 소공원 주차장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B지구 주차장에 주차 후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소공원까지 이동해야 한다.
매년 가을 단풍철이면 천불동계곡을 찾아 단풍 사진을 찍고 있지만 갈 때마다 새롭다. 비선대 가는 길가 나무 사이로, 산 능선을 넘어 비치는 아침 햇살을 담은 단풍이 신비로운 색감으로 한 컷 담기를 소원한다. 비선대 가기 전에 있는 짙은 옥색(玉色)의 맑은 물이 있는 웅덩이와 늘어진 떡갈나무 가지의 누런 잎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하는 장면은 찍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주요 피사체다. 조금 더 오르니 마고선이라는 신선이 너럭바위에 누워 감상하였다고 하여 부르는 ‘와선대’가 나온다. 오늘은 투명한 옥색의 물에 너럭바위의 반영(反映)이 운치를 더한다. 구름에 살짝 가려 햇빛이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누런 잎의 나무와 어울려 그런대로 괜찮은 사진이 나올 듯싶다.
소공원에서 비선대 가는 길은 거의 평지라서, 특별히 등산복 차림이 아니어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기에 좋은 길이다. 앞에서 걸어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는데, 중학생 정도의 아들과 함께 엄마, 아빠가 단풍 산행을 온 것 같다. 엄마가 “애가 어렸을 때 이 길을 걸어가는데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아 떼를 쓰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고 말하면서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웃으면서 아빠와 엄마가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그려진다. 단풍철이라 꽤 많은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가는 모습들을 뒤에서 보니 가지각색이다. 연인들로 보이는 젊은 남녀는 팔짱을 끼거나, 서로 손을 잡았고, 젊은 부부들은 어린아이들을 걸리거나, 안고, 업고 가고 있었고, 단체로 온 중년의 남녀들은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면서 오르고 있었다. 단풍 구경 왔다고 하는데 정작 단풍은 안중에도 없고, 벌써 단풍향에 취한걸까 모두들 흥에 겨워 즐겁기만 하다. 길 가득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길 좌우로 천차만별의 색감을 자랑하는 각종 나무들을 몇 컷 찍는다.
어느덧 비선대에 도착하고 있었다. 아침 햇빛을 받아 선명한 장군봉, 형제봉, 선녀봉이 파란 하늘과 함께 눈앞에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선녀봉에는 암벽 등반하는 사람들이 마치 바위에 핀 단풍처럼 울긋불긋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서 암벽 등반하는 사람들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암벽 등반하는 사람들을 근접 촬영하기 위해 300mm 망원렌즈를 장착한 후 파인더를 통해 보니 저들의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하기야 불안하면 저런 등반을 어찌하랴. 300mm로 몇 컷 찍고, 세 개의 거대한 바위를 한 프레임에 넣기 위해 12mm 광각렌즈로 교환한 후 자리를 잡고 보니 마침 한 무더기 양털 구름이 흘러오고 있다. 카메라 파인더를 보면서 프레임을 잡는데, 내 머리 위쪽 철다리에서 천혜의 비경을 관람하는 등산객들의 그림자가 카메라 앞 큰 바위에 비치는 게 아닌가? 우연히 발견한 그림자와 거대한 세 바위, 파란 하늘, 밀려오고 있는 하얀 구름을 멋진 프레임으로 찰칵 찍는다. 값진 사진을 찍은 것 같아 살짝 흥분된다.
천불동계곡을 향해 본격적인 단풍 산행을 시작한다. 조금 오르다 보니 단풍나무 아래 넓은 바위에 몇 사람이 늦은 아침식사를 하는데, 빛을 받은 단풍과 함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담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어 찰칵찰칵 몇 컷을 찍는다. 내려오는 사람, 올라가는 사람들로 좁은 등산로가 빈틈이 없다. 오늘은 유독 외국인 등산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외국인 젊은이 한 사람이 내 뒤를 따르면서 똑딱이 카메라로 단풍 사진을 찍고 있다. 분명 젊은이도 내가 느끼는 감흥으로 사진을 찍으리라. 그런 젊은이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 단풍을 배경으로 순발력 있게 한 컷 찍는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내려오는데, 빛을 받아 빛나는 단풍과 어우러져 멋진 장면을 연출하기에 자리를 잡고 찍기를 시작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노랑, 파랑, 빨강색의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려 카메라에 담는다. 산에 오는데도 한껏 멋을 부리고, 예쁜 옷으로 단장한 사람들이 사진작가에게는 더 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틈틈이 스마트폰으로도 찍어 지인(知人)들에게 카톡으로 실시간 날려 주니 고맙다는 답신들이 당도한다. 문명의 이기가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들을 가능케 하므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급경사를 앞에 두고 고개를 들어 보니 귀면암(鬼面巖)이 보인다. 바위 생김새가 무시무시한 귀신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귀신의 면상(面上)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귀면암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숨을 돌리고, 가져온 음식들을 서로 나누며 즐거워하고 있다. 귀면암을 지나 급경사인 나무 계단을 내려와 다시 귀면암을 돌아보니, 파란 하늘과 군데군데 피어 있는 단풍이 햇빛을 받아 무시무시하기는커녕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어 몇 컷 찍는다.
오른쪽 계곡에는 천 년 세월 갈고 닦아 반질반질해진 웅덩이에 진한 옥색의 투명한 물과 단풍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암벽(巖壁)으로 이루어진 절벽에는 크고 작은 단풍나무들이, 색동저고리 입은 꼬마들이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 가을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파란 하늘, 떠다니는 하얀 구름과 프레임을 구성하여 몇 컷 찍는다.
간간이 햇빛을 받아 고운 빛을 발하는 단풍을 찍으며 한참을 오르다 보니 왼쪽으로는 기암절벽, 오른쪽 철계단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등산객들과 함께 기대하던 오련폭포(五連瀑布)가 눈앞에 펼쳐진다. 다섯 개의 폭포가 이어져 있다고 해서 오련폭포라 불린다. 적당한 위치에 삼각대를 세우고 18-200mm 줌망원렌즈를 장착한 후 자리를 잡는다. 사람들이 없어도 단풍 사진은 찍을 수 있겠지만, 오늘처럼 사람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담으면 단순한 사진이 아닌 이야기가 있는 사진이 될 수 있다. 렌즈를 밀고 당기면서 다양한 구도로 여러 컷을 담고, 이어지는 행렬에 섞여 철계단을 오른다.
양폭대피소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고, 음식을 나누기도 하면서 떠들썩한데, 지난겨울에 대피소 건물이 불에 타 없어지고 빈 터만 남아 있어 황량한 느낌이 든다. 잠깐 휴식을 취하며, 준비해 온 김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10여 분 거리에 있는 양폭포와 천당폭포를 향해 오늘 단풍 출사의 마지막 길을 재촉한다. 양폭포를 지나 천당폭포에 도착하니 대청봉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섞여 혼잡스럽지만, 이런 모습 역시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면이 될 것 같아 카메라에 담는다. 천당폭포는 10여 년 전 설악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태풍 루사로 바위와 나무들이 함몰되어 옛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그래도 한 컷 찍는다.
하산하려고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정오를 넘어선 해가 계곡에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빛과 어우러지는 단풍을 찍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수년 간 사진을 찍으면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철칙으로 알고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 산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길에 미끄러져 얼굴을 다치고 카메라가 깨지는,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 있었기에 이제는 안전을 더 우선시하게 된다. 이번에 못 찍으면 내년에 다시 오면 되지 하는 여유로움마저 드니 사진가의 관록이 조금씩 묻어나는 것 같다.
올라오면서는 사진을 찍느라 산세(山勢)를 즐길 여유가 없었는데, 내려가면서는 천천히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옹기종기 피어 있는 단풍을 마음껏 즐기며 카메라에 담는 대신 심호흡하듯 마음속 깊은 곳에 담으리라. 이제 가을비 내리고 찬 바람 불면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떨어져 바람 따라 물 따라 어디론가 가 버릴 고운 잎, 내년에는 때를 알고 미련없이 자리를 비껴 준 너의 그 자리에 더 아름다운 잎 하나 달리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