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동강할미꽃
동강할미꽃
잔설이 남아 있는 이른 봄이면 그 고운 자태를 보여 주기 시작하는 동강할미꽃. 보통 할미꽃은 땅을 내려다보며 피는데 하늘을 향하여 활짝 웃는 꽃, 석회암 절벽 바위에서만 피는 꽃이라 바위할매(바위할미꽃)라 불리던 꽃이다. 그 꽃을 알현하기 위해 전국의 사진가들이 촌각을 다투며 달려와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귀하고 귀한 분이다.
영월 동강은 수억 년 전 석회암 대지가 솟아 오른 뒤 오랜 세월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하천이며, 주변에는 많은 석회동굴과 기암절벽이 가을 단풍과 어우러져 국내 최고의 비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병풍처럼 두른 기암절벽 아래로 굽이굽이 흐르는 동강은 자연 생태계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동식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언젠가 홍수로 인해 영월읍이 절반 이상 물에 잠기자, 수해 방지를 이유로 동강 유역에 댐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여론에 부딪혀 백지화된 일이 있었다. 수억 년 세월이 만든, 이 나라에 둘도 없는 비경을 한번의 홍수를 이유로 수장시키려 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면 댐을 건설해서는 안 되는 논지 첫 머리에, 세계에서도 유일한 ‘동강할미꽃’이 수호천사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석회암 절벽이 빚어낸 자주색․보라색․분홍색․흰색 등 다양한 색깔의 동강할미꽃이 피는 봄날에는 그곳에 가지 않고는 배겨 낼 재간이 없다. 처음 동강할미꽃을 찍기 위해 절벽 앞에 섰을 때 무슨 말로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한마디로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깎아지른 절벽 바위틈에 보석처럼 드문드문 박혀 있는 모습은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예사롭지 않은 긴장감을 갖게 한다.
바위로 이루어진 까마득한 절벽에 나무가 자라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꽃이 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상황이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았다. 꽃은 나무처럼 강하지도 않고, 뿌리를 깊숙이 내릴 수도 없기에 척박한 바위틈에서 자란다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고 질기면 저렇듯 사진가들의 애를 태우며 높디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나? 벌써 전국의 사진가들이 때를 알고 인산인해를 이루며, 어떤 이는 준비해 온 사다리를 놓고 절벽 중간쯤에서 곡예하듯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다. 사람의 키 높이에 피어 있는 꽃 주변으로는 몇 사람이 각자의 카메라를 들이대며 머리를 맞대고 있다. 동강할미꽃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은 해마다 때가 되면 성지순례하듯 동강을 찾고, 지역 주민들은 이에 화답하듯 축제를 열고 있다.
근접 촬영을 위해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동강할미꽃의 색깔과 고운 자태는 사진으로 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겉으로 볼 때는 곱디곱게만 보이던 것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햇빛에 비취는 솜털에서 강인함이 느껴진다. 슬픈 이야기가 있는 보통의 할미꽃에서 느끼는 수줍음과 가련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에만 자생하는 특산식물로서, 꽃잎과 꽃술이 하늘을 향해 뽐내듯 당당하게 가슴을 열고,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고 꿀리지 않는, 세계를 향한 한민족의 기상이라면 너무 비약한 것일까.
사람들의 무분별한 탐욕으로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동강할미꽃은 잎의 장수부터 일정하지 않고 3~7장의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새악시의 볼처럼 동그랗게 뒤로 말린 잎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은 잎과 뽀송뽀송한 솜털이 근육질 남성의 투박한 모습을 연상하게도 한다. 또한 색깔은 어떤가, 한 장의 잎에서도 끝으로 갈수록 점점 더 엷어지는 그라데이션, 보라색인가 싶으면 연보라를 지나 흰색에 가깝기도 하고, 자주색인가 싶으면 진하디진해서 갈색에 가깝기도 하며, 분홍색인가 싶으면 연분홍색을 띠는 현란한 색감에 도무지 눈을 떼지 못한다. 회색빛 늙은 바위들이 토해 내는 선혈이 한 줌의 꽃으로 탄생한 듯 신비롭기만 하다.
봄이 오고 사월이 시작되면 연례행사처럼 동강을 찾아 동강할미꽃을 찍고 있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개체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난해 보았던 그 신비로운 꽃이 아무리 눈 씻고 찾아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개체수가 줄어드는 이면에는 나와 같은 사진가들이 톡톡히 한 몫을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간결한 사진을 찍기 위해 꽃 옆으로 나와 있는 잡풀들을 치우기도 하고, 가위를 가지고 잘라 버리다 보니, 정작 꽃이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없애 버려 이듬해 싱싱한 꽃이 나올 리 만무하다. 가끔은 컴퓨터 속에 들어 있는 저장 폴더를 열어 지난날 찍었던 동강할미꽃을 들춰 보기도 하지만, 정작 다음해 가 보면 볼 수가 없어서 안타깝고 속이 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나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 일반이다.
내년에는 카메라를 집에 두고 빈손으로 동강에 가고 싶다. 올해 보았던 그 자리에서 내년에도 볼 수 있도록, 혹시라도 부실한 꽃이 보이면 흙이라도 보듬어 주고 와야겠다.
121207